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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ngsanghwa
38 관리자 2017-07-27 99
홍상화 ‘거품시대’,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묵직한 울림 (문화일보)


홍상화 ‘거품시대’,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묵직한 울림


게재 일자 : 2017년 07월 20일(木)



입체적인 캐릭터· 박진감 있는 이야기 전개로 독자 사로잡아

각 책은 손에 쥐기 쉽게 만들어졌다. 보통 책의 3분의 2 크기인 46판 형이다. 이게 5권이 되니 방대한 분량이다. 각 권이 264쪽에서 364쪽에 달하니 만만찮은 무게감을 준다.

홍상화 작가의 소설 ‘거품시대’ 이야기다. 1993∼1994년 일간지에 연재했던 작품을 한국문학사가 이번에 5권의 책으로 펴냈다. 20여 년을 넘긴 시점에서 이 소설의 세태묘사가 여전히 울림을 줄까. 책을 읽기 시작한 어느 시점부터 이런 의문은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인물 군상이 얽히고설키며 엮어내는 삶의 갖가지 모습들에 정신없이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나니 멍했다. 세상과 삶에 대한 온갖 감정들이 한꺼번에 엄습해왔다.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읽고 난 후의 상태와 같았다.  

이 소설은 권력과 돈을 맹목적으로 좇는 우리 사회의 거품을 조망하고 있다. 88올림픽이 열리던 해의 봄부터 3년간을 다루고 있다. 고도성장의 빛과 그늘 속에서 욕망의 거품이 한껏 부풀어 오르던 시기다.

주요 인물은 30대 후반의 중소기업인 이진범, 백인홍과 지식인 이성수. 대기업을 일군 진규식 회장과 그 아들인 성구·성호 형제, 정치인 권혁배가 역시 중요한 캐릭터다. 학벌과 배경의 부족을 간교함으로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대기업 간부 황무석도 빠질 수 없다. 황은 음모를 통해 주인공들을 어둠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이른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다. 여기에 아름답고 지적인 대학 강사 진미숙, 엘리베이터걸 출신의 모델 김명희, 매혹적인 음성의 연극배우 이혜정 등 여성 캐릭터가 남성 주인공들의 삶을 흔들어 놓는다.  

이 외에도 다채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만큼 이야기가 대단히 입체적으로 전개된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책은 맨 뒤에 등장인물도를 그려놨다. 또한 각 장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는지 작은 글씨로 간략하게 요약해놨다.  

책을 다 읽은 독자는 절감하겠지만, 작가는 소설 속 어떤 캐릭터에도 호오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모든 캐릭터가 빛과 그늘, 선과 악을 두루 갖고 있다. 선량함을 추구하는 이진범에게도 불륜의 사랑에 허우적대는 모순이 있고, 전형적인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 케이스인 진성구 형제도 자신들의 모순을 깨닫자 뼈저리게 후회한다. 권선징악의 뚜렷한 구조로 대중성을 확보해야 하는 신문 연재소설의 보편적 기법을 전혀 따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술술 읽히는 것은 이야기의 전개가 박진감 있는 덕분이다. 김승옥 작가는 책의 권두사에서 “줄거리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소설 속 대사와 지문을 통해 작가가 얼마나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를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기려고 애쓰고 있나 하는 점에 관심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맞는 말이지만, 책을 읽다 보면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마음이 절로 바빠진다.

소설 곳곳에서 스릴러 영화를 연상시키는 대목을 만날 수 있다. 한쪽에서 관세청의 기업 장부 조사가 진행되고, 같은 시각 다른 곳에서 그 기업 대표인 이진범과 진미숙이 격렬한 섹스를 벌이는 것을 교차 편집처럼 보여주는 장면 등이 그렇다. 기업의 비자금 조성, 하청업체 뜯어먹기, 권력자와의 네트워크 구축 등이 스토리를 끌고 가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는 저자가 실제 기업인으로 활동하며 보고 들은 것에 작가의 의무감으로 취재한 것이 합쳐진 결과가 아닐까 싶다.  

정치-경제 권력의 내부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는 부패와 욕망의 묘사가 소름 끼치도록 디테일하다. 실제로 보고 들은 것에 대한 작가의 혐오가 독자의 피부에 생생히 와 닿는다. 음습한 거래의 한 장소가 되는 룸살롱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독자로 하여금 음화를 몰래 엿보는 듯한 쾌감과 함께 씁쓸한 여운을 오래도록 남길 것이다.  

이런 거품시대의 풍경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을까. ‘적폐 청산’이라는 거칠기 짝이 없는 구호가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많은 이들이 ‘남아 있다’는 쪽에 손을 들고 있는 듯하다. 이 소설은 그에 대한 새삼스러운 각성을 줄 수도 있지만, 이런 거품이 본질적으로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성찰하는 것에 더 의미가 있다. 그것은 힘을 좇는 인간의 본능에 천민 자본에의 욕망이 결합했고, 고도성장을 지향한 한국 사회가 조장했다는 것. 이 소설에 등장하는 희곡 ‘박정희의 죽음’과 영화 ‘젊은 대령의 죽음’은 예술의 경지에서 그 성찰을 추구한다. 거품시대의 시원에 한국 근대화의 주역 박정희가 있다는 것. 그의 뒤를 따라 성장을 이뤄낸 우리는 왜 진정으로 추구했던 행복에 이르지 못하고 물신의 노예가 된 것일까.

희곡 ‘박정희의 죽음’과 영화 ‘젊은 대령의 죽음’은, 예술의 향기가 인간성을 회복시켜줄 수 있다는 희망을 심는다. 물고 물어뜯는 정글의 비극 속에서 파멸해가던 이진범과 진성구, 이성수, 진미숙 등 주인공들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세상과 화해할 수 있는 기제로 작용한다.

홍상화 작가는 연재 당시 작가의 말에서 “지난 시대를 돌아보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 바로 소설이 할 일이다. 그 세대와 오늘을 서로 화해시키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거품시대의 맑은 밑바닥을 보고자 하는 소망이 작가에게 있었던 것이다. 인생의 다양한 측면을 간접 경험하며 좀 더 깊이 있는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의욕을 주는 데 문학 작품의 뜻이 있다면, ‘거품시대’는 그에 값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나온 홍 작가는 회사를 창업하고 성장시키며 기업인으로 오랫동안 살아왔다.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에 의하면, “기업 관계에 대한 체험이나 기억이야 작가 홍 씨보다 몇 배로 더 풍부한 기업인이 수두룩하겠지만 적어도 문학판에서는 홍 씨가 제1인자”라고 했다. 홍 작가는 1989년 장편 ‘피와 불’(‘정보원’으로 개제)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작품을 영화로 각색해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각본상을 수상했다.  

이후 소설 ‘거품시대’를 조선일보에, ‘불감시대’를 한국경제신문에 연재했다. 장편소설 ‘사람의 멍에’ ‘범섬 앞바다’ ‘디스토피아’, 소설집 ‘전쟁을 이긴 두 여인’ ‘우리들의 두 여인’ 등이 있다. 2005년 소설 ‘동백꽃’으로 제12회 이수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문예지 ‘한국문학’ 주간과 인천대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를 지냈다.


홍 작가는 이번에 새로 책을 펴내면서 각 장의 앞에 이 시대 삶의 비의를 담은 경구들을 배치해놨다. 책을 다 읽은 다음에 그것만을 찾아서 되새겨보는 재미가 자못 크다.

‘숨은 연인을 가진 남자의 피치 못할 운명은 바로 그 연인이 불행해지는 것을 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1권 116쪽)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동물보다 더 동물적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머니는 약한 자식을 더 사랑하고, 동물은 더 강한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이다.’(1권 161쪽) 

‘가장 어리석은 남자는 자신의 에너지를 성욕이 넘치는 여자를 만족시키는 데 낭비하는 자다.’(2권 54쪽) 

‘LA와 뉴욕이 자본주의의 표본이라면 아무도 자본주의를 선망하지 않을 것이다(마약과 범죄와 폭력 때문). 반면 만약 서울이 자본주의의 표상이라면 모두가 자본주의를 하려 추종할 것이다.’(3권 11쪽)

‘그런 의미에서 뇌물죄에 관한 대가성 부분을 삭제한 ‘김영란법’을 처음 제안한 김영란은 한국의 선진화를 이룬 최고의 공헌자다. 한 사람의 좋은 두뇌가 어떻게 오랜 나쁜 역사를 지닌 사회를 한순간에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4권 76쪽)  

‘남자는 나이가 들면 ‘시간의 횡포’에 시달리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예술가는 예술행위를 통해 이길 수 없는 ‘시간의 횡포’로부터 도망갈 수 있다. 그래서 노년을 위해서도 누구나 예술가가 되어야 하고, 나무 한 그루 가꾸는 것도 ‘예술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5권 39쪽)

장재선 문화부장 jeijei@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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